경기도미술관 2024 동시대 미술의 현장전
《사라졌다 나타나는》
2024. 08. 08. — 2024. 10. 20.
경기도미술관 전시실 1, 2
경기도미술관의 ‘동시대 미술의 현장’ 전시는 2년마다 한 번씩 현대예술의 ‘동시대성’을 조망하는 기획전입니다. 2024년 전시 《사라졌다 나타나는》에서는 낯섦과 새로움을 모색하는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주의 깊게 살폈습니다. 전시 제목인 ‘사라졌다 나타나는’은 사라지면서 나타나는 가능성과 동시성을 의미합니다. 여기에는 앞뒤가 없습니다. 소멸과 생성이 하나로 일어난다는 개념은 ‘플랑크의 별’에서 실마리를 얻었습니다. 플랑크의 별은 루프 양자 중력 이론에서 거대한 별이 블랙홀로 응축하다가 입자 크기 정도로 작아진 별을 말합니다. 이 한계치 크기에 도달한 플랑크의 별은 이내 폭발하여 새로운 별들로 탄생합니다. 이번 전시는 플랑크의 별이 소멸하기 직전 대폭발을 일으키는 도약의 ‘가능성’과, 또 별의 죽음 끝에 새로운 별이 시작된다는 끝과 시작을 함께 내포한 ‘동시성’에 주목했습니다. 전시는 작품 하나하나를 플랑크의 별로 보고, 완전함보다는 불완전함 속에서 움트는 창조의 순간과 새로운 변화의 가능성, 그리고 그 동시성을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사라졌다 나타나는》의 작가와 작품들은 도약의 가능성을 발현하고 있고, 스스로 진화하면서 늘 시작과 끝을 열어가기에 이번 전시에서는 어떤 낯섦과 새로움을 동시에 보여 줍니다. 대체 불가능한 고유한 감각을 극대화하여 ‘나’는 어떤 상태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지 끊임없이 의문하는 별(최지목), 상대적이고 불확실한 생각과 그런 생각을 넘어서는 새로운 시선과 인식으로서의 별(강수빈), 반복적이고 규칙적인 떨림이 관객의 울림으로 치환되어 우리가 이 공간 안에서 함께 연결되어 있음을 감각하게 하는 별(그레이코드 지인), 낱낱이 부서져서 작아지고 소멸하는 과정에서도 새로 드러나는 면면을 끄집어내 들여다보는 별(권현빈), 축적된 시간과 경험을 바탕으로 내면의 생동하는 풍경을 다시 그리는 별(이혜인). ‘나’의 끝이 ‘너’의 시작이고 ‘너’의 끝이 곧 ‘나’의 시작인 우리의 관계와 삶의 순환을 돌아보는 별(장서영)이 그것입니다.
불완전하다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결함’이 있는 상태이자 동시에 변화할 ‘가능성’이 있는 상태입니다. 또 각자가 쌓아온 경험의 흔적이자 고유함을 만드는 요소이기도 합니다. 작품 역시 작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과 시선을 담고 있으며, 그들의 예술 세계에서 하나의 순간이자 어떤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술에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면, 그 일은 작품을 마주한 나와 작품이 주파수를 맞춤으로써 나의 세계가 확장될 때일 것입니다. 나의 결함에 당신이 연결되어 우리의 관계가 시작되듯이 이번 전시에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작가들의 작품에 주파수를 맞추어 보고 스스로 주변의 새롭고 낯선 의미들을 발견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어쩌면 그 순간이야말로 비로소 ‘나타나는’ 순간이 될 것입니다.
개막식
2024. 8. 8. (목) 오후 4시
경기도미술관 2층
개막퍼포먼스
2024. 8. 8. (목) 오후 4시 30분
경기도미술관 전시실 1, 2
그레이코드, 지인 〈#include 레드 (파이퍼 에디션)〉
※ 현장 상황에 따라 운영시간은 조정될 수 있습니다
경기도미술관 2024 동시대 미술의 현장 《사라졌다 나타나는》 전시 전경
경기도미술관 2024 동시대 미술의 현장 《사라졌다 나타나는》 전시 전경
경기도미술관 2024 동시대 미술의 현장 《사라졌다 나타나는》 전시 전경
경기도미술관 2024 동시대 미술의 현장 《사라졌다 나타나는》 전시 전경
경기도미술관 2024 동시대 미술의 현장 《사라졌다 나타나는》 전시 전경
경기도미술관 2024 동시대 미술의 현장 《사라졌다 나타나는》 전시 전경
경기도미술관 2024 동시대 미술의 현장 《사라졌다 나타나는》 전시 전경_최지목 작가
경기도미술관 2024 동시대 미술의 현장 《사라졌다 나타나는》 전시 전경_최지목 작가
최지목, 〈인상, 일몰〉, 2024, 린넨에 아크릴릭, 162.2x130.3cm ⓒ 최지목, 갤러리바톤 제공
최지목은 전통적인 회화의 개념과 형식에 질문을 던지며 자신만의 새로운 시선과 방향을 제시하는 작업을 보여왔다. 이번 작품에서 작가는 시각예술에서 주요하게 작동하는 빛과 빛의 감각에 대한 작가의 경험과 실험을 작품에 녹여냈다. 실제 태양 빛을 바라보는 경험과 그 경험에 의한 눈의 반응에 따른 ‘빛’과 ‘색’을 담았다.
‘잔상’은 외부 자극이 사라진 후에도 감각의 경험이 지속되어 나타나는 상을 말한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무엇인가를 보려면 반드시 빛이 필요하다고 여기겠지만, 잔상은 빛이 없는 어둠에서도 볼 수 있는 일루전으로 한순간도 고정되어 있지 않다. 또 그 색채는 태양 아래에서 본 색과 반대인 보색을 비롯한 다양한 색으로 변한다.
작가는 태양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우리의 눈은 자연스레 무의식적으로 깜빡이게 되는데, 이러한 눈의 움직임과 빛에 의한 시신경의 반응으로 태양 빛을 보는 작가의 눈에 잔상이 태양 빛 주변으로 어른거리며 나타났다. 깜빡일 때마다 그 일루전은 계속 변화했다. 작가는 빛을 보는 눈과 시신경의 감각과 반응으로 드러난 잔상을 태양 빛과 함께 담았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잔상을 집요하게 관찰하고 캔버스에 그 모양과 색채를 표현하였다. 작가는 ‘캔버스에 포착된 빛의 잔상은 찰나에 지각된 시각 현상을 기록한 것이며 자연과 몸이 함께 만들어내는 생성과 소멸의 섭리를 함축한다’라고 설명한다. 빛을 색으로 표현하고, 빛을 보는 감각과 찰나의 현상인 일루전을 붙잡기 위해 재현의 한계가 분명히 존재하였고, 작가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왔다. 그리고 우리는 그 과정의 결과를 마주하고 있다. 그 보이지 않는 시간의 축적이기도 한 여러 겹으로 겹쳐진 색면은 한가지 색상만으로는 구현할 수 없는 오묘하고 아름다운 화면의 어른거림을 만들어 낸다.
예술이 눈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는 것이라고 할 때, 작품은 우리가 잔상을 보듯이 새로운 방식의 보기와 감각하기로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기를 제안한다. 작가는 대체 불가능한 고유한 감각을 극대화하여 보이지 않아도 볼 수 있는 것과 내가 감각하고 기억하는 것은 무엇이고 나는 어떤 상태에서 무엇을 감각하는지 질문하며 그 감각의 기억과 경험을 우리와 공유한다.
경기도미술관 2024 동시대 미술의 현장 《사라졌다 나타나는》 전시 전경_강수빈 작가
경기도미술관 2024 동시대 미술의 현장 《사라졌다 나타나는》 전시 전경_강수빈 작가
경기도미술관 2024 동시대 미술의 현장 《사라졌다 나타나는》 전시 전경_강수빈 작가
강수빈, 〈Untitled(curve)〉, 2022, 나무 합판에 철판, 거울, 발포잉크, 90x180x40cm
거울 매체를 활용한 강수빈의 작품은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의 차이, 인지하는 것과 실재의 차이를 돌아보게 한다. 우리가 보고 믿는 것들과 그에 따른 경험과 생각이 얼마나 불확실한지를 보여 준다.
개별 거울 조각은 우리 시야를 그 크기만큼으로 제한하지만, 그 조각으로 구성된 작품 안에서는 오히려 동시에 여러 상이 맺히기도 하고, 여러 각도에서 시야를 제공하기도 하며, 공간감을 확장해 나의 시선에 따라 변화하는 환영을 무한히 만들기도 한다.
거울에 맺힌 이미지를 보고 인지하는 순간은 언제나 늦다. 우리 눈은 여러 면에 맺힌 다양한 환영을 동시에 볼 수 없다. 그 이미지를 좇다 보면 다른 면에 맺힌 환영이 계속 움직이며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다. 작품 안에서 주체(거울을 보는 나)와 대상(거울 속의 나)의 시선이 교차하며, 나의 응시는 거울 속 나를 바라보는 다른 환영의 응시들에 압도된다. 작품 안에서 주체도 대상도 아닌 ‘비체’☆가 되는 순간은 내가 나로 그리고 타자로 동시에 작동하게 한다. 나의 시선을 인식하는 순간 타자화되는 경험이 작품 안에서 반복적으로 이루어진다.
전시장에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문득문득 마주하는 강수빈의 작품에 비치는 풍경이 우리의 시선을 잡아끈다. 작품을 구성하는 거울 면은 긁혀서 그 안쪽 재료인 유리가 드러나 있다. 거울과 유리 사이로 서로 다른 풍경이 겹친다. 풍경에 반영되는 환상이 끼어들었는지, 환상을 보는 내 시선에 현실이 끼어들었는지 의문이 든다. 작품은 움직이면서 계속 변화하는 풍경과 그 위치를 돌아보게 한다. 그 풍경에서는 나의 거울 이미지가 사라지지 않는다.
★비체(卑體, abject): 주체도 객체도 될 수 없는 존재. 아예 존재 자체가 지워진 존재.
경기도미술관 2024 동시대 미술의 현장 《사라졌다 나타나는》 전시 전경_그레이코드, 지인 작가
경기도미술관 2024 동시대 미술의 현장 《사라졌다 나타나는》 전시 전경_그레이코드, 지인 작가
그레이코드, 지인, 〈파이퍼〉, 2024, 오디오-비주얼 설치, 3채널의 사운드 (1대의 36Hz~125Hz, 2대의 33Hz~23kHz), 1채널의 비주얼 (유리에 투사, 150x150cm), 8채널의 인/아웃 알루미늄 패널, 자체 제작된 광섬유 케이블, 자체 제작된 소프트웨어(openGL 과 java 컴퓨터 언어 활용), 20분(반복 재생)
그레이코드, 지인은 소리라는 매체 혹은 그 현상 자체의 특성과 그 여러 층위를 탐구한다. 작가들은 소리를 단순히 듣는 행위가 아니라 시청각의 스펙트럼 안에서 우리에게 다양한 예술적 시청각
경험을 제공하여 절대적 현재성을 부여하는 작품을 선보여 왔다.
미술관이 진동한다. 작품과 신체와 공간이 함께 울린다. 특정 주기와 간격으로 진동의 세기가 변화한다. 낮은 주파수의 소리는 심장 소리와 맞물리듯 신체에 진동과 울림으로 느껴진다. 소리는 보통 공기나 물 같은 매질의 진동으로 전달되는데, 그 중 공기를 통하는 전달이 가장 늦다. 이 공간에서도 공기를 매질로해서 소리가 전달되고 있지만 실제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히 전시장 안에는 소리가 존재한다. 작품의 신호에 따라 유리창에 비추는 빨간색과 진동이 그 증거이다.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주파수 소리는 아니지만 주파수가 낮은 소리와 빨간색으로 치환된 그 시청각의 떨림이 우리에게 울림으로 와닿는다. 들리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을 우리는 보고 느낀다. 작품이 설치된 공간 속 스피커와 여러 장치는 서로 연결되어 상호작용을 하며 이 떨림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전시 개막 당일에 나타났다 사라진 퍼포먼스의 흔적도 이 떨림에 함께 영향을 주고 있다. 시공간의 흔적과 관계가 만들어낸 떨림은 공간의 바닥과 벽, 천장 그리고 이 공간 안에 있는 우리 몸의 울림으로 치환되어 우리가 이 공간에서 함께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게 한다. 그리고 이 울림과 떨림을 느끼면서 우리는 우리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인지하게 된다.
그렇다면 진동이 느껴지지 않으면 소리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 법하다. 작품은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사실은 우리가 속한 공간, 또는 이 세상 안에서 얼마나 제한적인지, 반대로 우리는 얼마나 풍부한 소리와 빛의 진동 사이에 존재하는지 생각하게 한다. 진동과 침묵 사이에서 전시장의 소음들이 들린다. 그 수많은 것들 사이에서 우리가 느꼈다고 믿게 되는 경계치를 생각하게 한다. 작품의 떨림이 느껴지다가 사라지더라도 우리는 그 떨림 안에 함께 존재한다. 그리고 작품 속에서 이 공간과 우리는 하나가 된다.
경기도미술관 2024 동시대 미술의 현장 《사라졌다 나타나는》 전시 전경_권현빈 작가
경기도미술관 2024 동시대 미술의 현장 《사라졌다 나타나는》 전시 전경_권현빈 작가
권현빈, 〈물루〉, 2024, 석회석에 잉크, 가변설치
‘대기 덩어리 안’에 있는 삶의 조건과 느낌은 권현빈 작품에서 자주 출발점으로 작용한다. 손에 잡히지 않는 대기와 구름은 형체를 규정하기 어려운 자연현상이다. 작가는 이런 자연현상을 오랜 시간 응시하고 조각으로 포착한다.
<물루>의 면면에는 수많은 시간성이 묻어 있다. 오랜 시간 켜켜이 쌓여 하나의 결정이 된 돌을 상상해 본다. 단단해 보이는 결정의 빈틈을 파고든 비와 바람에 돌이 잘리고 부서진다. 그렇게 바위가 돌이 되고, 돌이 모래가 되고, 모래가 흙으로 다시 평평해지고 다시 쌓이는 영겁의 시간을 가늠해 본다. 작가의 작품은 그 오랜 시간을 앞당겨 부서지고 작아지고 흩어지는 상태로 ‘빨리 감기’ 되다가 어느 시점에 ‘일시 정지’ 된 파편과 같다. 이 파편은 과거의 일부였고 현재 상태인 동시에 그다음을 예감하게 하는 전체이다. 작품의 일부는 바로 직전보다 더 작아지고 부서져 새로운 면을 드러내고 있기도 하다.
작가는 조각의 안으로 파고들고자 잉크가 새어 들어가게 한다(누수 시킨다). 잉크가 스며들어 고이면서 돌의 표면과 그 안쪽의 질감이 드러난다. 작품은 작가가 조각의 가능성과 물리적 한계를 바탕으로 재료를 탐구하고 그 조각에 더 가까워지고자 한 과정의 흔적으로 지금 이곳에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는 전시 안에서 마치 조각의 한가운데로 새어 들어간 잉크처럼 그 조각들의 한가운데에서 그의 흔적을 마주한다. 낱낱이 부서져 작아지고 소멸하는 과정에서도 새로 드러나는 면들을 끄집어내 들여다보면 어디에서 왔는지보다 지금 어떤 모습인지가 더 중요해진다. 지금의 상태로 이곳에서 우리와 마주하고 있으며, 우리에게 앞으로 어떤 상태로 흘러갈지 돌아보고 어떻게 평평해질지 예감하게 한다.
경기도미술관 2024 동시대 미술의 현장 《사라졌다 나타나는》 전시 전경_이혜인 작가
경기도미술관 2024 동시대 미술의 현장 《사라졌다 나타나는》 전시 전경_이혜인 작가
이혜인, 〈나무와 혜우와 나〉, 2023-2024, 린넨에 유채, 228x195cm
우연성과 더불어 현재에 충실한 그리기 방식에 집중하는 이혜인에게 근래의 주된 작품 소재는 기억과 경험이다. 작가의 작품에는 직접 경험한 여러 시공간에 대한 기억이 담겨 있다. 처음에는 잊힌 공간을 찾아 그곳에 머무르며 그 풍경에 대한 기억과 함께 현재 자신이 경험한 새로운 감각을 녹였다. 때로는 새로운 공간에 익숙해지고 적응하고자 그 공간을 담기도 했다. 오랜 시간 한 겹씩 덧바르고 덧칠하며 물감으로 형상을 빚듯 화면에 기억의 조각들을 소환하고 자신의 현재를 얹는다. 우연히 마주하는 물감 덩어리에서 어느 날의 기억이 떠올라 캔버스 한편에 그 형상을 드러내기도 한다. 오랜 시간 다양한 장소를 거쳐온 여행의 끝에서 탄생한 작품에는 여러 시공간 속에서 언젠가 존재했던 작가 자신이 담겨 있다. 풍경뿐만 아니라 그 장소에 속한 작가의 감정과 생각, 새로운 관계와 기억이 섞여 있다. 밀도 있는 강렬한 붓질에 혼재된 시공간이 생동하며 새롭게 탄생한다.
작품의 속 인물들은 작가의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이다. 작가는 자신에게 가장 뚜렷한 기억, 가장 많이 생각하고 마음에 담아둔 대상과 공간을 작품에 담았다. 작가의 ‘코어메모리’☆는 풍경과 요소들로 작품에 등장한다. 혹은 작업하는 자신의 현재가 빚어지기도 한다. 세상을 바라보는 틀인 경험과 기억으로 구성된 삶의 한순간이 작품 속에 녹아 있다. 기억을 그린다는 것은 그의 삶을 되짚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원동력을 스스로 부여해 보고 또 과거와 기억 속 감각을 현재로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여전히 꿈틀거리는 과거의 기억들, 찬란한 기억이 켜켜이 쌓여 지금의 내가 존재한다. 삶의 경험과 감각은 ‘코어메모리’가 되어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틀이 되고, 그 틀을 매개로 나는 다시 세상과 마주한다. 내 안에 쌓인 시간과 경험을 바탕으로 외면이 아닌 내면에서 생동하는 풍경을 다시 그려본다. 작품을 보며 나는 앞으로 어떤 풍경을 그려나갈지 생각하게 된다.
★코어메모리 :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 등장하는 개념. 삶의 주요한 경험과 감각, 그에 대한 기억을 말하며 그 인물의 성향, 태도, 가치관 등에 주요한 영향을 미친다.
장서영, 〈폴딩 오퍼시티〉, 2023, 단채널비디오, 컬러, 무성, 4분 7초
장서영, 〈폴딩 오퍼시티〉, 2023, 단채널비디오, 컬러, 무성, 4분 7초
장서영, 〈서클〉, 2017, 단채널비디오, 흑백, 유성, 7분 58초, 경기도미술관 소장
장서영은 삶과 죽음의 과정에서 한계가 있는 존재에 주목하며 다양한 영상과 설치 작품을 선보인다. 그의 작품은 육체, 삶, 제도, 제한, 세계의 한계, 신체에서 우리가 존재하는 공간에 이르기까지 유한함을 인지하고 느끼게 한다. 작가는 태어나는 순간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중간지점 어딘가에서 자신의 작품을 마주하는 관객에게 이야기를 건넨다. ‘나’의 끝이 ‘너’의 시작이고 ‘너’의 끝이 ‘나’의 시작인 우리의 관계와 삶의 순환을 돌아보게 한다.
〈서클〉은 작가가 그간 지속적으로 탐구해 온 신체와 반복의 키워드를 잘 드러내는 작품 중 하나이다. 시작한 이후 끝을 향해 흐르는 시간 속에 존재하는 것들의 결함과 유한함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시작과 끝은 무한히 반복된다. 영상 작품이 전시장 안에서 전시될 때, 관객은 대개 작품의 중간지점 어딘가에서 작품을 마주한다. 시작, 끝, 그리고 반복이라는 시간성을 가진 전시 환경의 특성과 연결되어 작품의 이야기는 더 극대화된다. 전시에서 우리는 작품이 어디서 시작되고 어디서 끝나는지 명확히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작품을 마주하게 된다. 작품의 흐름 중 명확히 알 수 없는 시점에서 감상을 시작하게 된 관객은 오히려 관람하는 중간에 작품의 끝과 ‘진짜 시작’을 보게 되고, 때로는 두 번째 끝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언제든 이 공간과 작품을 벗어날 수 있다는 전제가 열려있다. 매 순간이 새로운 시작이자 끝이다. 이 ‘루프’ 되는 곳에서 빠져나올지 혹은 그 끝을 다시 맞이할 것인지는 우리 선택에 달려 있다. 끝과 시작을 알 수 없는 모호한 시간성 안에서 작가는 신체, 불안, 공허, 종말, 병듦, 그 모든 시작과 끝 사이 출구를 알 수 없는 순간을 연장한다.
모니터 가득 반투명하고 네모난 판이 펼쳐져 있다. 그 위를 더듬어 가는 손의 흐릿한 실루엣이 보인다. 손이 움직이는 대로 반투명 화면이 접힌다. 제목처럼 ‘불투명함이 접히는(폴딩 오퍼시티)’ 중이다. 흐릿한 손이 불투명한 화면을 더듬으며 접어 가는 동안, 반투명 판이 겹칠수록 그 면들의 불투명도는 점점 높아져 흰색으로 변화한다. 그리고 그 크기는 작아져, 어느 순간에는 손으로 접기 힘들어지는 두께가 된다. 그 반투명 판은 그 시점에 가장 뚜렷한 흰색이 되어 화면에서 빛난다. 불확실함을 더듬으며 작아지고 작아져 소멸에 가까워지는 상태로, 또는 더 접기 어려울 정도로 두께가 두꺼워지는 상태로 계속 변화하는 지점은 여러 의미에서 삶을 은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