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소장품
배형경
인간은 태어나서, 살다 죽는다
배형경(1955-)은 인체 조각을 통해 인간의 실존과 우리가 겪는 비극적 상황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그는 오랫동안 꾸준하게 작품을 선보여 왔으며 표현주의 구상 조각, 그중에서도 인체 조각만을 고집해 온 한국 구상 조각계의 보기 드문 여성작가이다. 배형경은 오귀스트 로댕(1840-1917)과 알베르토 자코메티(1901-1966)의 거친 조각 양식을 수용하여 무게감 있고 묵직한 형상을 한 인체 조각으로 ‘인간의 삶과 죽음’이라는 명제 하에 인간의 실존적 고독과 번뇌를 표현해왔다. 고된 노동력을 요하는 전통 ‘소조’방식으로 이루어진 그의 작품은 익명성, 미완성, 정면성을 특징으로 한다. 작가는 성별을 알 수 없는 익명의 인물상에 덩어리와 평면의 질감을 강조하여 계속적으로 생성, 변화하는 신체를 보여준다. 이러한 ‘미완성의 미학’으로 표현된 동(動)적인 미감은 그의 작품에서 중요한 요소이다. 서울대학교 학부와 대학원에서 조소를 공부한 배형경은 1989년 첫 개인전 이후 다수의 개인전과 단체전에서 작품을 선보였다. 김종영미술관(2010) '오늘의 작가'와 김세중조각상(2020) 본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경기도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인간은 태어나서, 살다 죽는다 1〉(2004)는 강건한 느낌을 주는 한 사람의 몸뚱이가 나무 밑에 굳건하게 서 있는 등신대의 브론즈 조각이다. 몸에 비해서 작은 머리, 생략된 이목구비, 큰 손과 발은 전체적으로 세부 표현 생략되어 있지만 표면에서 손바닥으로 문지른 작가의 흔적이 묻어난다. 고개를 숙인 채 중력을 버티며 서 있는 한 사람의 모습은 태어나 죽음에 이르기까지 삶의 고난을 홀로 오롯이 겪어야 하는 실존적 운명을 보여주고 있다. 주어진 자리를 지키는 듯 서있는 이 인물의 모습은 움직이지 못하는 수동적인 자세가 아니라 엄습하는 비극적 재난에 대한 가장 주체적인 저항이다. 〈인간은 태어나서, 살다 죽는다 1〉은 평화로워 보이는 공원 한편에 있지만, 우리 옆에 항상 존재하는 비극과 그 통렬한 감정을 들여다보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