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소장품
정서영
정오에서 자정까지
정서영(1964–)은 주로 익숙한 사물들이 빚어내는 낯선 상황을 통해 또 다른 경험의 조건을 만드는 작업을 해 왔다. 작가에게 사물은 다양한 의미의 중첩을 일으키고 파생시키며 새로운 상황들을 표명하는 언어로서 기능한다. 그는 장판지, 카펫, 스티로폼, 스폰지, 나무 등의 일상적인 재료들을 가공하지 않거나 덜 가공한 상태로 그 재료들이 지닌 기능적인 측면을 그대로 작품 안에 들여온다. 일례로, 〈-어〉(1996)라는 작품의 소재인 리놀륨 민속장판은 바닥재 역할을 유지함으로써 캔버스를 대신하고 〈전망대〉(1999)는 전망하는 기능을 유지한다. 또한, 작품 제목은 관람객들이 낯선 상황 그 자체를 직시하게 하고 작품의 표면에 머물게 함으로써 ‘깊이’로 표현될 수 있는 것들이 갖는 권위의 허구성을 드러내고자 한다. 동시에 작품, 제목, 작가 이 세 가지 요소로 작품의 의미를 캐려는 관람객들의 관습적인 태도에 물음을 던진다. 예를 들어, 〈스포츠식 꽃꽂이〉(1999)는 권투장갑과 각목들이 말 그대로 ‘꽃꽂이’ 된 작업인데 다중적이며 비결정적인 언어의 속성을 드러낸다. 정서영은 서울대학교 조소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독일 슈투트가르트 미술대학에서 수학하였다. 2003년 김세중 청년조각상을 수상하였고 2007년 아뜰리에 에르메스, 2010년 LIG 아트홀, 2022년 서울시립미술관 등에서 다수의 개인전과 2002년, 2008년 《광주비엔날레》, 2003년 《베니스비엔날레》 등의 단체전에 참여하며 활발하게 활동해왔다.
〈정오에서 자정까지〉(2007)는 레몬색 알루미늄 용기에 모래가 반쯤 담겨있는 작품이다. 작은 입자의 모래가 구불구불한 알루미늄 외곽 형태에 담기면서 모래와 용기의 물질성이 극대화된다. 모래와 용기의 물질성에서 드러나는 공간감과 정오에서 자정까지 하루의 반이자 12시간, 그리고 오후에서 밤으로 가는 시간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작가는 사물의 물질성을 극대화하여 우연히 발생하는 사건을 드러낸다. 이렇듯 정서영의 작품은 이질적인 오브제들의 구성에 토대를 두고 있다. 이 오브제들은 조용하고도 개인적인, 혹은 별개의 작품들로, 개별 작품들로서도 각각 설득력 있는 작품이지만 그 전체 구성을 통하여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작가는 이미 알려진 이미지나 오브제를 사용하거나 복제할 뿐 아니라 자신의 작품끼리도 서로를 밀접하게 참조하면서 작가의 언어 체계 이전에 내면의 눈으로 포착된 사물, 상황, 사건, 즉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비언어적인 것을 조형적으로 구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