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라키비움 김정헌
《소위 잡초에 대하여》
2022. 10. 20. — 2023. 03. 05.
경기도미술관 프로젝트 갤러리
경기도미술관은 올해부터 연구를 기반으로 한 전시 ‘경기라키비움’을 시작한다. 라키비움(Larchiveum)이란 도서관[Library], 기록보존소[Archives], 미술관[Museum]의 합성어로 이 기능들을 모두 제공하는 공간을 지칭한다. 경기라키비움은 미술관의 수집과 연구 기능을 심화하고 확장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신규프로젝트로, 작품을 하나의 완결된 절대적 가치로 보던 해석 방식에서 벗어나 작가의 전 생애를 구성하는 활동의 결과로서 바라볼 것을 제안한다.
경기라키비움의 첫 번째 초청작가 김정헌(金正憲, 1946~)은 우리나라 민중미술의 기수(旗手)로 꼽힌다. 그가 사회․문화적 격변의 한가운데에서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완성하였을 뿐만 아니라, 교육자이자 행정가로서도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는 데 이견이 없다. 그러나 작가로서의 반백 년 화업(畫業)을 총체적으로 살펴보기에는 이에 관한 연구가 충분하다 할 수 없다. 연구 대부분이 1979년 ‘현실과 발언’ 결성 이후에 집중되어 있고, 그전의 활동은 제대로 의미를 조명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더욱이 김정헌이 작가로서 삶을 모색하며 교육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 1970년대에는 부족한 자료 탓에 그 면모를 파악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소위 잡초에 대하여》는 그간 공백에 가까웠던 김정헌의 1970년대 활동에 주목하여 그의 초기 작업과 자료를 새로 발굴하고 한데 모았다. 출발점은 작가가 2021년 경기도미술관에 기증한 ‘잡초’ 연작 다섯 점이었다. ‘잡초’ 연작은 당대 한줄기 흐름을 형성했던 모더니즘 경향의 기하학적 추상화로, 기존에 알려진 김정헌의 작업과 유사성을 찾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흩어진 기록을 모으고 추적하는 과정에서 1970년대 격동의 사회에 갓 발을 내디딘 신진작가의 고뇌와 독자적 조형 언어를 만들기 위한 부단한 노력의 결과를 찾을 수 있었다. 당시 1970년대에는 전통문화와 ‘한국성’에 관한 관심이 고조되었고, 미술계에서는 한국미술의 국제화를 꾀하고 있었다. 이 시기 김정헌은 동시대 조류의 수용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도 본인의 작품세계를 구축하기 위한 실험을 거듭하였다. 그는 캔버스, 천, 비닐, 종이, 나무와 같이 여러 매체를 다루면서, 고구려 벽화와 백제의 산수문전, 신라의 곡옥과 같은 전통 요소의 조형미를 탐구하였다.
작가의 1970년대 작품들은 형식 면에서 매우 다양하지만, 주제는 일관되었다. 바로 현실의 삶이다. 김정헌은 1966년 창간한 계간 『창작과비평』에 연재된 아르놀트 하우저(Arnold Hauser, 1892~1987)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방영웅(方榮雄, 1942~2022)의 『분례기』 등을 읽으며 예술과 삶의 밀접한 관계를 자각하고, ‘리얼리즘’에 대해 고민하며 청년사(靑年社)의 책들을 탐독하였다. 1973년에는 ‘잡초’가 처음으로 작품에 등장한다. 그는 잡초가 가지는 군중성(群衆性), 무명성(無名性) 그리고 “밟힐수록 일어나 꽃을 피우는” 강한 생명력에 주목하였다. 이처럼 작가에게 잡초는 민중의 삶을 대변하는 모티프였다. 잡초를 그리던 때 김정헌은 오수환(吳受煥, 1946~), 원승덕(元承德, 1941~) 작가와 이른바 《잡초전[三人展]》(1975, 1977)을 꾸리기도 하였다. 변두리에서도 허세 없이 뿌리를 내리는 잡초는 국전[大韓民國美術展覽會]과 단색조 회화로 양분화된 미술계에서 막 활동을 시작한 신진작가들에게 필시 정서적 공감대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더불어 작가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졸업생이 주축이었던 ‘신체제(新體制)’, 《6인전(六人展)》(1978~1979)을 비롯하여 《한국실험작가전》(1974), 《대구현대미술제》(1974~1975) 등에 참여하며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미술의 활로를 모색하였다.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이 시기 작가의 삶과 작업에 내밀히 다가가기 위하여 아카이브와 기록을 찾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아카이브를 통해 비로소 그 의미가 드러나는 작업도 있었다. 산발적인 자료를 모으고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김정헌을 비롯한 1970년대 한국 미술계 젊은 예술가들의 치열한 고민과 도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처럼 경기라키비움 《소위 잡초에 대하여》에서 시도한 연구가 한국 현대미술사를 보다 입체적으로 기술하고 더 나아가 그 지평을 넓히는 데 일조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