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소장품
홍영인
소리, 배우, 그리고 아무것도 실존하지 않는 무대
홍영인(1972–)은 ‘동등성’에 관한 질문을 미술로 실천하는 작업을 해왔다. 드로잉, 사운드 설치, 공간 설치, 퍼포먼스, 평면, 책 만들기, 섬유, 자수 등의 다양한 매체와 방식을 사용한다. 특히 집단으로 일어나는 감정과 현상, 경험에 주목하며, 무대적인 시공간을 도시 공간에 연관 짓고자 한다. 2000년경부터 재봉틀로 자수 작업을 시작한 작가는 바느질을 순수미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장르 간의 경계를 흐리는 동시에, 아시아의 수공 방식을 예술적 언어로 전환하는 독자적인 작업 방식을 구축해 왔다. 실을 정리하지 않고 그대로 남겨두는 것도 완성된 결과보다 만들어지는 과정 자체에 무게를 두기 위함이다. 이를 통해 여성과 남성, 동양과 서양처럼 당연하게 여겨져 온 시각적 구분을 되묻고, 미술작품의 권위, 독창성, 상업적 가치, 문화적 고유성 등에 대한 복합적인 질문을 던진다. 미술시장의 시스템 바깥에서 일상적이지 않은 ‘지각의 경험’을 발견하는 것이 작가의 일관된 관심이다. 서울대학교 학부와 대학원에서 조소를 공부하고 영국 런던 골드스미스 대학교에서 순수미술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3년 석남미술상, 2011년 김세중조각상을 수상하였고, 2019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후보로 선정된 바 있으며 2014년 《광주비엔날레》와 2015년 런던 ICA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해 왔다.
〈소리, 배우, 그리고 아무것도 실존하지 않는 무대〉(2007)는 무대배경천 위에 아크릴 채색, 스프레이, 자수를 결합한 작품이다. 석조 문 안쪽으로 붉은 무대천이 드리워진 중앙에는 이순신이 자리하고, 양옆으로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노예상 등 동서양의 기념비적 도상들이 늘어선다. 그 위로는 신의 형상과 연설하는 정치인의 모습이 겹쳐지고, 꼭대기 정중앙에는 코끼리가, 그 양옆에는 광장의 사자와 사원의 사자상이 배치된다.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낯선 기와지붕이 이 모든 장면을 하나의 무대처럼 감싸 안는다. 작가는 종교, 역사, 문화를 가로지르는 기념 조각들을 끌어와 현재의 맥락을 덧입혀 새롭게 배치한다. 각자의 시대와 장소에서 숭배되거나 기억되어 온 동상들이 오늘날의 옷을 입고 한 무대 위에 소환되는 것이다. 익숙하게 소비되어 온 상징을 낯선 자리에 놓는 이 작업은, 무심하게 스쳐 지나가던 것들을 다시 발견의 대상으로 만든다. 역사와 권위의 상징들이 실이라는 낯선 재료를 통과하며 맥락에서 떼어져 뒤섞이는 순간, 기념비는 기념비이기를 멈춘다. 실재했던 것들이 맥락을 잃고 기호로 남은 이 무대는,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것들의 자리를 되묻는다. 소리도 있고 배우도 있지만, 무대 위의 모든 것이 연출된 것이듯 우리가 숭고하다고 믿어온 영웅, 신화, 권위 역시 그렇게 만들어진 것일 수 있다. 아무것도 실존하지 않는 무대는 그 질문을 우리 앞에 펼쳐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