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소장품
최기창
배수로
최기창(1973-)은 주로 일상적 차원에서 작동하는 언어, 기호와 같이 우리의 인식체계를 구성하는 사회, 문화적 조건 등을 탐구한다. 연속되는 삶에서 확연히 보이지는 않지만 삶을 이끌어 가는 어떤 동력이나 속성을 발견하고 재배치하는 그는 우연처럼 벌어지는 일치의 순간을 시각화한다. 특히 작가는 뜻밖의 기쁨이나 행복, 사랑 등을 주제로 오랫동안 작업 해왔는데 이러한 감정들이 사회, 정치적인 믿음과 결합하였을 때 개인에게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게 되는지에 관심을 가져왔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순응해왔던 모순과 불합리를 인식하고 직시하려는 작가의 태도는 자신과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팽팽한 대립 속에 스스로를 주체적으로 하는 ‘자발적 단절’의 행위를 지향한다. 작가는 이러한 소재들을 다양한 매체 실험을 통해 반복적이고, 무작위적인 방식으로 재구성하여 작업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 속에 나름의 규칙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홍익대학교 학부과 대학원에서 판화를 전공하고 영국 첼시예술대학교에서 준석사를 마친 최기창은 중앙미술대전(1998) 우수상을 수상하면서 작가 활동을 시작하였다. 또한 삼성미술관 리움(2012), 《부산비엔날레》(2016), 《광주비엔날레》(2018) 등의 다양한 전시를 통해 작품을 선보여 왔다.
〈배수로〉(2010)는 공공장소인 경기도미술관의 건축적 구조 속으로 스며들어 주변 환경과 조용히 호흡하며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작품이다. 미술관 주 출입구 방면의 녹지화 된 수(水)공간 주변을 따라 배수로가 배치되어 있다. 작품이 놓이는 환경의 온습도를 비롯한 제반 여건을 수용하며 평소 자신의 작가적 견해가 담긴 문장들을 넣었는데, 띄어쓰기 없이 빼곡히 들어찬 이 문장들은 쉴 틈 없는 우리 일상의 단편을 반영하고 있다. 비가 오면 그 문장들 속으로 빗물이 모여 배수된다. 배수로 덮개의 재질과 형태에 미묘한 변화를 주어 새로운 혹은 낯선 시각 효과를 유도하면서도 배수로의 기능 역시 충실히 수행한다. 의외의 장소에서 우연히 발견된 이 텍스트가 과연 미술관의 주변을 맴돌던 발걸음을 미술관 안으로 이끄는, 혹은 반복된 삶에 변화를 가져오는 사색의 단초를 제공해 줄 수 있을까? 그 답은 알 수 없다. 하지만 미술관을 에워싸고 있는 조금은 다른 이 배수로를 통해 ‘안락한 익숙함’의 지루한 반복 속에서 ‘낯선 익숙함’을 인식하도록 하는 것, 그리고 그것에 과감히 직면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최기창의 작업이 꿈꾸는 또 다른 세계로 향하는 자발적인 단절의 행위이다.